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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종명(초분)유적지 조성 에 대한 소고:호남디지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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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종명(초분)유적지 조성 에 대한 소고

호남디지털뉴스 | 기사입력 2013/05/21 [15:28]

김삿갓 종명(초분)유적지 조성 에 대한 소고

호남디지털뉴스 | 입력 : 2013/05/21 [15:28]
향토사 /난고문학연구가 문 제선

 

1,김삿갓은 어떤 사람인가 ?

난고(蘭皐) 김병연(炳淵)(김삿갓)(1807∼1863)은 조선후기 사람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고 천민으로 적락되어 35년간을 줄 곳 방랑생활을 하며 자기가 겪었던 울분을 인도주의에 근간을 둔 민중성 해학성 파격적인 시를 당시 사회의 고답적인 사고를 뛰어 넘어 자유 자재로운 시를 많이 남겨 사망 후 70년이 지난 후 세상에 부상된 기이한 방랑시인이다.

김삿갓(김병연(炳淵))은 1807,3,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에서 당시 권문세도가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아버지 김 안근(安根) 과 어머니 함평 이씨(李氏) 사이에서 3형 재 중 2남으로 태여 났다

이름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며 삿갓은 세상이 지어준 세 명(世名)이다

선생의 나이 5살(1811년)때 당시 평북 선천군 부사 겸 방어사로 재직 중인 김 익순이 농민군의 반란군(홍건적)에게 투항(投降)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평으로 어머니 이 씨는 충청도 결성으로
김삿갓은 형 병하와 함께 집안 노복(奴僕)인 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피난 생명을 부지하며 살고 있었다.

1812년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면서 김익순만 능지처참(陵遲處斬)처형되고 다른 가족은 멸족의 위기에서 폐족(廢族)으로 전락되면서 남의 눈을 피해 살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

1813년 가평에서 전 가족이 다시 만나 살면서 3남 병하를 낳아 가족이 늘었으나 아버지 김안근이 화병(火病)으로 사망하고 또 어린 병하마저 사망하자 어머니 함평이씨는 두 아들 학균과 익균을 끌어않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을 잘 가르쳐 가문을 복원하려는 일념(一念)으로 250리나 떨어진 먼 영월 땅 10승지로 알려진 피난처로 가기위하여 여주로 옮겨 은신하다가 강이 풀리면서 배편(땟목)을 이용하여 영월로 가기로 마음먹고 있다가 땟목을 타고 영월군 삼왕리에 머물러 살면서 두 아들들의 교육에 전념을 다하며 살아오다가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과거(科擧)를 보아야할 때가 되어 감으로서 준 호구단자(호적등본)를 만들 기위해 남이 잘 모르는 곳으로 80리 나 떨어진 와석리 어둔이 로 1826년 이사를 하고 살면서 장수 황 씨와 결혼하였다.

1826년 어머니가 만들어준 신분서를 가지고 영월(寧越)도호부(都護府) 동헌 백일장(白日場)에 들어가 시험을 보는데 과제(課題)가 『논 정가산충절사 탄 김익순 죄 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이었다 “정 가산의 충절 된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았음을 통탄하라는 것이었다.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란 것을 잘 모르고 지금까지 공부한 실력을 과시하고 또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유감없이 글을 지어 참시관에 제출하고 나와 장원은 하였으나 김익순의 후손이란것이 탄로나 장원이 취소되자 앗 차 내가 조상에게 큰 죄를 지었구나 하는 압박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지금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 하였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소악(小惡)을 범하여 대선(大善)을 이루려면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도 호구단자를 만들기 위하여 조상을 버리고 바꿨으니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 하며 가문을 되찾으려면 이런 것쯤은 참고 견디어야 한다 하며 가을에 돌아올 초시(初試)준비를 위해서는 서울로 가서 양반 자재들과 교우하며 공부하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1828 년 학균을 낳은 뒤 어머니의 성화(成火)에 못 이겨 서울로 가서 양반가의 자제들과 교우하며 보단자를 얻어 과거 길을 찾기 위해 향반인 광주(廣州) 김씨(金氏)로 변장하여 이름은 란(鑾)이오 자는 이명(而鳴)이며 호는 지상(芷裳)이라 하고 양반 자제들과 교우하며 지내면서 진로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사회가 부패 할대로 부패되고 과거제도와 벼슬아치들의 실상을 살펴 볼 때 병연은 권문(權門)에 기대여 과거를 통해 출세해 보려는 생각을 단념하였다.

또한 벼슬길에 나가 벼슬을 한다하여도 아부 아첨하는 생활로 살아야 함이 싫어져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산천과 각 고을 서당을 두루 섭렵(涉獵)하면서 때로는 훈장도하고 또 걸식도 하면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2 년 후1830년 귀가하였는데 벼슬길을 마다하고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돌아온 병연을 보고 어머니는 보통으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꿈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병연의 마음을 돌려볼 생각으로 봇 다리를 싸들고 집을 나서며 과거를 하기 전에는 나를 다시 볼 생각을 말아라. 하고 친가가 있는 결성 땅으로 떠나 버렸다 이때가 어머니와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병연은 1년 여간 가정에 머무는 동안 형 병하가 사망하자 장남 호균을 형수 앞으로 입양시켜주고 1830년 둘째아들 익균(益均)을 낳고 다시 집을 나와 조상에게 지은 불경의 죄가 너무 커서 하늘을 보기가 두렵다는 생각으로 삿갓을 쓰고 대 지팡이에 의지 해 전국 각처의 명승지를 두루 섭렵유람(遊覽)하며 각 고을 서당도 두루 섭렵하면서 때로는 훈장도하고 때로는 걸식도 하면서 방랑생활을 계속하며 당시 사회의 부도덕한 사회상과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하고 돈만 있으면 양반이 되어 거드렁 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꼴 을보고 끌어 오르는 울분을 풍자(諷刺)와 해학(諧謔)하는 시로 조롱(嘲弄)하였고 서민(庶民)들의 애환과 생활상(生活相)과 그 지방의 풍경과 인심을 글로 짓고 천민과 서민을 대변 하는 많은 민중(民衆)시를 남기고 돌아다녀 가는 곳마다 김삿갓의 시정(詩情)이 남아 머물고 있었던 방랑시인으로 1863년3월 29일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 창원(昌原)정(丁)씨 사랑채에서 종명(終命)한 유명한 시인이었다.

김삿갓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망 75년이 지난 후 1939년에 이 응수선생이 전국에 널리 깔려있는 그분의 시문을 탐문 수집하여 그중 128수를 가지고 『김립시집』을 출간 하였다. 출간해 놓고 보니 사회 반응이 높아지자 1941년 취합된 90여수를 더 하여 증보판 을 출간 하면서 부터이다

선생의 시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감탄하며 미국의 휘트먼 일본의 석천탁목(石泉啄木)과 한국의 김입(金笠)을 세계 3대 시 혁명가로 추앙(推仰)하였다

이응수 선생은 김삿갓 시인의 성향을 분류하여 시인의 성격을 통속(通俗)시인 민속(民俗)시인 인생(人生)시인 생활(生活)시인 걸인(乞人)시인 빈궁(貧窮)시인 방랑(放浪)시인 풍류(風流)시인 걸인(乞人)시인 파격(破格)시인 언문(諺文)시인 과(科)시인 역사(歷史)시인 대 문장 가라고 규정하였다

그 이후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30여 편 이상의 시집과 소설이 발행되었고
현재까지 선생의 시는 500여수가 가깝게 수집되었으며 일본 미국 중국에서도 그 나라 글로 시집이 발행되고 있으며 세월이 갈수록 김삿갓 시를 연구하는 단체와 김삿갓 시를 통한 한시 연구가 각 대학에서도 이루어 지고 있으며 석 박사 학위논문을 발표하는 사람도 날로 증가해 가고 있으며 멀지 않아 김삿갓 원전시집 발간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2, 김삿갓이 화순 동복에 남긴 행적(行蹟)은 ?

김삿갓은 한평생(57)동안 유년 시절을 재외하고는 35년간을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걸식 방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객사(客死)로 생을 마치니 더욱 기록이 전래된 것이 없다 그래서 그분이 남긴 시 가운데서 어렴프시 행장을 떠 올려 볼 수 있다
현재 까지 발견된 김삿갓의 시문이 500여수가 되어 가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 고장과 연관된 것 만 을 가지고 풀어 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고장 전남대학 호남 한문학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연대나 저자미상인 필사본 장유적벽탄유객무주(將遊赤壁歎有客無酒)란 시문이 있다

호남팔경중 으뜸이라 하는 적벽이 있다 적벽은 중국 항주에 있는 적벽과 쌍벽을 이루는 절 경지 이다 중국의 적벽은 소동파란 사람이 적벽부를 써서 아름다운 글과 풍경을 알렸는지라 김삿갓도 소동파 못지않은 한시의 자질이 있다고 자부하여 한번 가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적벽을 구경하기 위해서 전라도로 내려와서 광주에서 무등산 장불 치를 넘어 규봉 암과 영평 도석 적벽을 통하는 대로를 따라 적벽을 삿삿이 구경하고 나서 『장유적벽탄유객무주(將遊赤壁歎有客無酒)』적벽을 유람할려하는데 손은 있으나 술이 없을 을 탄식하노라 하는 제하에 소동파 적벽부를 능가 한다고 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 글 가운데 『동파이후북로선 임술지여신축추(東坡以後北路仙 壬戌之餘辛丑秋)』소동파 이후 북에서 온 선비인데(자신)적벽부를 지은 임술 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신축년 가을일세라 는 글귀 가운데 신축(辛丑)년은 1841년(선생나이 35세 때)이다 또 선생시 가운데 『무등산고송하재(無等山高松下在)적벽강심사상류(赤壁江深沙上流)무등산이 높다 하드니 소나무 가지 아래 있고 적벽 강이 깊다더니 모래위에 흐르는 구나』이시도 이때 지은 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방랑객에게는 숙식(宿食)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구암 창원정씨집 사랑에서 행인에게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을 듣고 정씨집 사랑채에 가보니 역시 숙식에 크게 불편함이 없도록 후하게 대접을 받고 보니 방랑생활을 하면서 문전박대나 잘 곳이 없어 노숙(老宿)한 때를 생각해 보면 마치 자기 고향집 같은 감화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씨 집안은 1730년대 소문난 효자요 동몽교관을 지낸 백인당 정치업선생이 후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경몽가』를 지어 전하여 대대로 이를 실천하는 덕목으로 『내 집에 오는 손을 후하게 대접하라』란 말을 가훈으로 여기며 살고 있으며 또 그 후예들과도 학문적으로 무엇 인가 소통이 되니 더없이 편안함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또 사랑채 서제를 살펴보고 붓을 들고 시를 지었는데

반휴서가수권책(半携書架數卷冊) 세세전전일개연(世世轉傳一個硯)
묵향심취심자한(墨香深醉心自閑) 미구차외하소구(微軀此外何所求)

성심서우동복(性深書于同福) 이라 낙관하여 친필시문을 남겨놓았다

낙관 중 난고 김병연이 아니라 성심서우동복이라 한 점이다 선생의 시문을 통한 행적을 살펴 볼 때 나이 40세 미만에는 자나 가명 김란 지상 이명등 가명을 많이 써왔으나 40세 이 후 자신의 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 지면서 위상이 부상 된 뒤부터는 난고 김병연이라 확실하게 밝힌 점이 있다

그래서 이시도1841년 적벽을 탐방할 당시에 썼던 것 아닌가 하고 판단된다.

다음은 1850년에 지었던 친필 시문이다 구암마을 앞 산록 와우 봉에 있는 망미대의 명소를 둘러보고 시상을 얻어 『약경심홍선(藥經深紅蘚) 산창만취미(山窓滿聚微)선군하하취(羨君花下醉)』라 하고 또 동복 동헌 앞에 있는 협선 루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고 『군루승효상(郡樓乘曉上) 진일불능회(盡日不能回) 만색장추지(晩色將秋至) 장풍송월래(長風送月來)』도광 삼십년 난고 김병연 동복여소시묵야(道光三十年 蘭皐 金炳淵 同福旅所試墨也) 이 도광 삼십년은 1850년이다 이 친필시문은 소장자 압해정씨 창원군파 종중 소장자가 1995년5월 KBS에서 실시하는 진품명품에 출품하여 진품임을 확증 받은 작품이다.
풍류(風流)시인 김삿갓이 풍류고장인 동복에 와서 그 풍치를 보고 감탄하거나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복은 호남8경중 으뜸이라 하는 적벽(赤壁)이 있고 적벽에 는 망미정(望美亭) 강선 대(降仙臺) 환학정(煥鶴亭)과 그 아래에 만경(萬頃)대의 총벽정(叢碧亭) 고소대(故蘇臺) 협선루(挾仙樓) 포월정(抱月亭) 봉황(鳳凰)대 물염(勿染)정 등이 동복천 굽이굽이마다 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김삿갓 시를 연구 하는 학자는 그 행적을 살펴 볼 때 1852년 이후는 남부지방인 부여 금삼 익산 여산 정읍 남원 영광 장성등 무등산과 지리산권을 중심으로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다

1841년 적벽과 주변 경관과 창원 정(丁)씨 집 인심을 살펴보고 마치 자기 고향집처럼 포근한 정을 느껴 제2의 고향으로 생각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북으로 올라가 못가 본 곳을 더 살펴보고 1840년대 후반부터는 남부지방으로 발길을 돌려 동복 창원정씨 집을 거점으로 남부 지방에서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어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자기가 태어났던 하천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 회귀성(回歸性)이 있고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 쪽으로 두르고 죽는다고 하듯이 김삿갓도 회향(懷鄕)심 속에서 지내다가 1863년 3월 29일 동복면 구암리 창원정씨 사랑채에서 종명하여 영원한 인연의 땅으로 맺어놓고 떠난 것이다. 초분이후 3년 뒤 에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태백산록으로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었다

3, 왜 김삿갓 종명유적지를 조성해야 하는가?

김삿갓은 생전에는 남루한 걸인시인으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객사를 하였던 시인이다
그러나 사후 그 행장이 알려 지면서 한사람이 3개의 유적지를 가진 사람이다 경기 양주의 출생(出生) 유적지 화순 동복의 종명(終命)유적지 강원 영월의 안장(安葬)유적지가 그 것이다 사망 100년이 넘은 후에 이렇게 많은 유적지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 그의 삶이 올곧았단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조상에게 욕되게 하고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배반하였던 그 과오를 잊지 못하고 지은 죄가 너무 무거워 하늘을 처다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에 35년여 동안을 삿갓을 쓰고 대지팡이에 의지하며 평생을 살아온 절 효자(節孝子)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의(義)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남의 샘물을 훔쳐 마시지 말고 (渴不飮盜泉水) 아무리 더워도 더러운 나무 그늘에서 쉬지말아라(熱不息惡木陰)배가 고프고 추워도 부도덕(不道德)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나 불의(不義)에는 야합(野合)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그분의 시 정신은 인도주의에 근간을 둔 민중성 해학성 파격성으로 요약하여 볼 수 있다.

벼슬아치 들은 부정과 부패로 썩어가고 힘없는 백성들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김병연이 대처할 수 있는 방편은 풍자로 비판하고 야유와 희화로 여유를 즐길 수 있었으며 일탈의 경지에 다 달았던 것이다

넷째는 그때까지 한시에 나타난 고답적이고 독선적인 선민의식과 위선적이고 허례 허식인 현학취향을 과감히 털어 냄으로써 민중성을 확보 권세가의 고고한 생활 가정이 아닌 일반 백성의 사실적인 생활감정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생활의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정물과 동물을 시의 소재로 삼았고 사람이 시의 소재가 될 때도 노인 병신 점쟁이 풍수 등과 같은 천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학적으로 그려내었다
김삿갓의 시들 중에는 파격 성을 갖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자유를 소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답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시에서 파자 파운 이중자의 동음(同音)이어(異語) 등을 동원했고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쓰기도 했으며 한시의 형식을 빌려 순 한글시를 쓰기도 하였다

당시 시인들로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작법을 무시해 버리고 상황에 따라 우리말 의태어와 의성어까지 동원하여 생동감을 한껏 살려 헌것을 깨고 새것을 만들고자 하는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생의 시문을 살펴 볼 때 방랑을 시작한 초창기에는 자기 가슴에 쌓인 울분과 분함을 참지 못하여 풍자(諷刺)와 해학(諧謔)하는 시로 조롱하며 울분을 달래었는데 방랑이 오래 지속되면서 자연의 풍치(風致)와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보고 느꼈음인지 걸식 방랑의 처지를 넘어 도인(道人)처럼 8도 강산을 순례하는 선인(仙人)의 경지(境地)에 넘어 사물의 경지를 꾀 뚫는 감각으로 지어진 서정시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주는 그분의 시상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세계3대 시 혁명가로 추앙받는 난고 김병연 선생이 우리 동복과 영원한 인연이 맺어 있는 사실을 올바로 알리고 전하여 역사를 올바로 후세에 전하고
유적지를 조성하여 선생의 시문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읽게 하여 우리들의 생활 속에 그 분의 시혼(詩魂)을 심어 정서적 보탬과 강개(慷慨)적인 성품을 길러 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고

우리 군이 지향해 나가고 있는 풍류문화에 김삿갓 시혼도 일부분이라도 접목시켜 화순 풍류문화 조성에 보태어 관광 문화사업에 기여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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